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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얘기

서점 탐방 1일차 - 혁명, 혁명, 그리고 혁명!

by 성지_ 2025. 1. 10.

출판 편집 스터디원들과 처음으로 서점 탐방에 나섰던 날!

 

혼자 왔을 때보다 배는 더 머물렀던 것 같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친다고 하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었다. 자꾸만 발목을 붙잡는 책들이 얼마나 많던지.

 

나는 평소처럼 아동 청소년 매대 근처를 서성이다가, 어쩌다보니 건강 분야의 매대에서 멈춰 섰다. 그때 스터디원이 내게 해준 말이 기억이 남는다. “건강 코너를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쳤다. 건강 분야의 매대는 요즘 유행이라고 하는 ‘저속 노화’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나이 먹기가 싫은가 보다. 특히 ‘유 퀴즈 온 더 블록’, ‘세바시’ 등에 출연하며 화제를 모은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를 비롯해 저속 노화 기법으로 유명한 교수와 의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띠지에서 일제히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보는 선생님들. 마치 병원에 온 느낌이 든다. 이상하리만치 무슨 ‘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책들도 숱하게 보인다. <에이지 혁명>, <운동 혁명>, <내 몸 혁명>…….

 

사진이 엄청나게 흔들렸지만 건강 코너의 매대다.

 

 

교보문고는 2024년 연간 분야별 동향 리포트에서 ‘느리고 건강하게 나이 들기, 저속노화가 대세’라는 제목으로 “저속노화 서적이 건강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휩쓸었다.”고 트렌드를 분석했다. 재밌는 건 상위권에 위치한 베스트셀러의 제목과 주제를 분석해 보면 나이와 나이 듦에 대한 인식 변화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예스24는 2024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트렌드 및 도서 판매 동향 리포트에서 ‘웰에이징’ 서적이 유행하는 현상을 두고 ‘100세 시대를 맞아 40·50대가 이전처럼 은퇴가 가까워진 나이가 아닌, 새로운 시작 혹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재조명’되었다고 독자들의 인식 변화를 짚는다. 중요한 것은 나이 듦을 거부하는 ‘안티’의 태도가 아니라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웰에이징’의 자세라는 것. 그를 증명하듯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등 나이 듦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는 책이 작년 한 해 동안 많은 중장년층 독자에게 사랑받았다. 어쩌면 건강 ‘혁명’에 관한 책이 쏟아지는 것은 건강과 나이 듦에 대한 시각이 급진적으로(?) 변화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이제 나이 마흔, 쉰쯤은 오히려 뭐든 시작할 수 있는 ‘혁명의 시기’라는 것.

 

재작년에는 노년에 대해 늘어난 관심이 에세이와 인문서뿐 아니라 경제 경영서까지 뻗쳤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재작년 노후•노년의 삶 관련 베스트셀러 10위권 내에 은퇴 이후 경제적 준비에 대해 다룬 경제 경영서가 5권이나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당시 자기계발서 역풍이 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독자가 불안한 노년을 대비하는 일종의 대비책을 강구한 결과로도 해석될 수도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2023년, 2024년 두 해 동안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처럼 중년층을 겨냥한 책이 한창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서점에 가보니 아직도 매대에 수도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제는 쇼펜하우어뿐 아니라 이제는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괴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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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는 한편으로 ‘텍스트힙’이라는 또 다른 혁명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웰이징이라거나 돌봄 같은 키워드가 중장년층의 세대 혁명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면 텍스트힙은 흔히 일컫은 MZ세대들의 문화적 혁명으로, 패스트푸드 같은 숏폼 온라인 콘텐츠에 지친 젊은 층이 다시 텍스트 콘텐츠로 회귀하는 현상이다. 성인 독서율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은 출판계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상황. 물론 텍스트힙 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텍스트힙이 그저 유행에 그칠 것이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출판게에 그리 이익이 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일지언정 텍스트힙 문화는 한 해가 지난 지금까진 아직 건재해 보인다. 서점에 들르니 ‘텍스트힙’이란 이름으로 큐레이션된 매대가 서점 중앙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잉아의 순우리말 그림 사전

 

또 눈에 띄었던 큐레이션 매대, ‘작고 강한 출판사의 색깔있는 책’. 겉보기에도 특이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망서사에서 지난해 11월에 출간한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소설책은 표지에서부터 심오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내지에 비하자면 특이한 편도 아니었다. 스터디원이 내지를 보더니 인쇄비가 많이 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쥬쥬베북스에서 같은 시기에 발간한 <잉아의 순우리말 그림 사전>도 척 보고 눈에 들었다. 새빨간 표지의 하드커버에 어딘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요즘 한국어 관련 서적이 많이 보이는데, 여전히 화제인 문해력 논란이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한국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늘어서 좋다. 이와 비슷하게 영풍문고에서도 독립출판 플랫폼 ‘인디펍’의 기획전을 만나볼 수 있기도 하다. 작년에 좋아하는 독립출판물을 찾으러 직접 갔었는데, 생각보다 특이한 작품들을 많이 접해볼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표지 / 동일한 책 내지

 

문해력 뛰어난 아이는 이렇게 읽습니다 / 우리말 기본기 다지기

 

결국 젊은 세대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책을 찾아 헤맨다는 점에서 작고 강판 출판사의 색깔있는 책이나 독립출판물이 이토록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예전보다 잘 조성될 수 있는 것 같다. 독립 서점이나 북카페, 팝업스토어 같은 공간이 유행하는 흐름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까닭에 책을 매개로 하는 오프라인 공간이 곳곳에서 주목받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요즘은 자가 출판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으니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보려는 사람들도 많을 테다. 결국 텍스트힙은 일시적인 유행에 지날지 몰라도 어느 정도는 출판물의 주제라거나 형식부터 마케팅 방식까지 일련의 출판 과정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이른바 ‘한강 효과’로 시들시들하던 출판계가 탄성을 받은 것에 관해 일각에선 이러한 흐름을 ‘텍스트힙’과 같은 문화 유행과 더불어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해 출판 전문 웹진 출판N에선 한강 작가의 수상이 ”‘주류’의 도서가 아닌, ‘비대중적인’ 도서의 문학적 가능성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 바 있다. 한강의 작품이 ‘아시아’ ‘여성’의 글로서 도외시되었던 주변부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탓이기도 하고, 한강의 작품세계가 성숙한 남성으로 대표되는 재래적인 문학 장르의 규범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판N에선 이러한 한강 작가의 독특한 작법을 두고 ‘괴상한 글쓰기’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한강의 글이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올 만한 폭발적인 창의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덧붙여 출판N은 괴상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작가들이 끝없이 탄생하여 문학의 장 안에 운동 에너지를 계속해서 불어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강 효과에 힘입어, 되려 도식적인 글쓰기가 팽배하게 될까 봐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한 것이다. 텍스트힙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움직임은 과연 한강 붐을 안정적으로 떠받쳐 줄 문화적 기반이 되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