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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해외문학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하루키 파워의 굳건함

by 성지_ 2024. 3. 21.

* 스포일러 주의!

 

간단한 서평

경계 위로 부유하는 상실과 연민의 구름

 

하루키 책은 처음인데 나름 재밌게 읽었다. 700쪽이 훌쩍 넘는 분량인데도 꽤 몰입해서 읽었기 때문에 완독까지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거장의 작품답게 환상적인 분위기의 세계관이나 인물 간에 오가는 감정의 묘사가 생생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내용이 반복적인 도시 묘사나 혼란스러운 심리를 가중시키는 데 할애된다는 점은 아쉽다. 만약 1700년대 환상 문학을 좋아하고 하루키를 즐겨 읽는다면 이 집요한 묘사가 지루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공연히 책장 자리만 차지시키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문학동네가 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갯글을 참고하면 좋다.

 

"하루키는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리고 소설에 대해 ‘마음으로 쓰는 것’ ‘마음과 논리적인 의식의 간격을 메워나가는 것’ ‘논리만으로 구제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밝혀왔다."

- 문학동네 제공 책 소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는 무엇이든 논리적으로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그 때문에나는 마구잡이로 교차하는 맥락을 이해하고 싶어서 소설에 사용된 기표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데 공을 들였다.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현실인가 환상인가? 평행세계의 사람들은 본체인가 그림자인가? 벽은 정지했는가 움직이는가? 꿈은 환상세계인가 현실인가?... 이 말장난처럼 보이는 물음은 이야기 속에 셀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한다. 다음의 기록은 이야기에서 구분을 두지 않으려는 개념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여름-겨울

환상-현실

삶-죽음

도시-외곽

여성-남성(성적 욕망의 정도에서 대비되는)

상식-비상식

비장애인-장애인

구체-추상

정지-변화

사랑-상실

외면(소설에서 눈(眼)이 상징하는 것, 화자가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내는 행위와 연관된다.)-내면

과거-현재

자연-사회

거짓-진실

무의미-의미

실체-관념 

자신-타인

 

1부에서부터 사용된 '비가 쏟아지는 바다' 메타포는 이러한 뒤엉킴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적절한 표현이다. 비가 쏟아지는 바다는 비에 의해서 조금씩 변하겠지만 그 변화를 무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비와 바다는 늘 순환하고,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펼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1부에서 명확하게 분리되던 그림자와 본체는 3부에 가서는 다시 합쳐지면서 그 구분이 무용해진다. 비와 바다가 만나는 것처럼 주인공은 그림자와 본체 모두가 자신임을 믿게 된 것이다.

 

작가 후기를 살펴보면 이 소재와 관련한 하루키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하루키는 '이동하는 형체'를 진실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이동은 바다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순환하지 않는 바다는 바다가 아닌 것 같이(그러나 적어도 바다의 일부나 한 측면이라고는 할 수 있으리라). 예컨대 삶의 역동성이란 진실을 외면하고 그 단면만 바라보고 살듯이 말이다.

 

'바닷물은 증발해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를 내린다. 영원한 사이클이다. 바닷물은 그렇게 조금씩 교체되어간다. 그러나 바다라는 총체가 변화하는 일은 없다. 바다는 늘 똑같은 바다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인 동시에, 하나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79p)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 작가 후기

 

이렇게 하루키가 그린 스케치를 구체화시키는 방법은 다름 아닌 연민과 사랑이다. 하루키는 진실의 역동성이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뻗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부는 시골의 한적한 도서관이 주 배경이 되어, 여태 진실에 대해 혼란을 겪은 주인공이 변화를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다. 예컨대 주인공은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중년 아저씨를 이해하고, 새로운 연인에게 마음을 열고, 서번트 증후군으로 보이는 소년을 진심으로 헤아리게 된다. 더불어 주인공에게 도움을 받은 인물들은 이로써 자신의 상실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야기의 후반부에 주인공은 결국 그로부터 변화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에 이르게 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도달하는 곳은 휴머니즘의 경계 너머다. 하루키는 삶의 경계와 진실이 자신의 의지와 연대가 맞닿는 곳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루키가 43년 동안 품고 있었던 깊은 사유이자 그의 새로운 뿌리가 될 시발점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하루키가 앞으로 써낼 작품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심은 연대의 씨앗으로부터 시작되리라 짐작해본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684p)

 

 

 

1. 디자인 및 내지 편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옆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한국판 커버 (왼쪽) / 속표지 (가운데) / 커버의 뒷모습 (오른쪽)

 

속표지는 흰 배경에 각양각색의 그래픽 선들이 위아래로 뻗어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심플한 이미지로 표지를 구성했다. 그래픽 선에는 각각 그라데이션 효과가 다르게 적용되어 있는데, 이것이 호수에 비친 도시의 야경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흰 배경에 단조로운 그래픽, 그리고 그 위로 작게 새겨진 저자와 제목이 표지의 전부여서 조금 밋밋하게 느껴진다.

 

반면, 한국판에 씐 커버에는 어둡고 진한 녹색이 배경 색으로 채택되어 눈에 잘 띄고, 무엇보다 눈이 편하다(여러 번 나누어 읽어야 하는 책의 두꺼운 분량을 고려한 걸까?). 한편 다양한 색의 그래픽 선 모티프는 한국판 커버에도 잔류하여 표지의 중앙을 지키고 있다. 저자의 이름과 일본어로 쓰인 제목은 여전히 동일한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 크기가 훨씬 커졌다.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은 그래픽 선들과 배경 위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커버의 어떤 요소보다 눈에 띈다. 이 특이한 수정 작업은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가 국내 문학시장에서 위치한 위상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많은 독자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텍스트의 원문을 그대로 붙여 넣기 한 듯한 뒷커버. 디자인보다는 텍스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2. 마케팅 및 홍보: 보도자료와 출판사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국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일본 작가 중 한 명이다. 국내에서 하루키의 이름이 알려진 지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국내 문학 시장에서 그의 위치는 단연 독보적이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 출시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은 알라딘 독자 선정 올해의 책 2023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냈다 하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하루키 파워 때문에 매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여러 출판사들이 앞다퉈 판권 경쟁을 하는 소식을 접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루키의 독자는 다양한 연령대에 분포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많은 세대는 3•40대의 청년층, 일명 ‘무라카미 하루키’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루키의 작품을 접하면서 단단하게 축적되어 온 하루키 팬층의 기둥 같은 존재다. 때문에 6년 만에 출시된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울 소식이리라. 더군다나 하루키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43년이란 세월의 사유가 압축되어 있는 하루키의 자화상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즐겨 읽거나, 그의 팬이라면 이 책을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편 문학동네는 하루키 작품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는 잠재적 독자들도 염두에 두었다. 앞서 말했듯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하루키가 일생동안 천착해왔던 메시지와 세계관을 담고 있다. 더불어 확고부동한 하루키의 입지는 책의 소장 가치를 분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즐겨 읽지 않더라도 한 권씩 소장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독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문학동네는 보도자료에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그의 신작을 기다려온 팬들에게 하루키 세계를 집약한 결정적 작품으로, 이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하루키 세계로 들어가는 완벽한 입문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문학동네는 이 황금알을 붙잡고자 출간하기도 전에 하루키를 전면에 내세우는 마케팅을 펼쳤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 집필과 출간을 둘러싼 저자의 이야기에 주안을 두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80년 문예지에 발표했던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40년 간 품어두다 마침내 2023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재탄생시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사실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저자 후기에서 직접 쓰기도 했다. 이를 강조하듯 책의 커버 뒤표지에는 ‘하루키 세계의 시작, 그리고 마침내 그 완성!’이란 문구와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의 집필 후기 한 줄이 새겨져 있다. 문학동네는 보도자료에서 책의 예약판매 지수와 출판에 얽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를 첫머리에 두었다. ‘첫 발표 이후 43년, 마음에 품어왔던 소설을 마침내 완성하다’라는 문장이 굵은 글씨로 쓰여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여태까지 문학동네가 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과는 디자인부터 차별점을 둔다.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시되긴 했지만) 간단한 스케치 같은 일러스트가 중심이 되던 표지를 버리고, 배경의 단색과 그래픽을 내세운 비교적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채택했다. 판매 부분에선 에코백이나 포스터 같은 하루키의 굿즈를 적극 제작해 독자들에게 판매하거나 구매 혜택으로 지급하고 있다.

 

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장수 고양이의 비밀」

 

이동진 평론가와 콜라보 영상을 제작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동진은 대중들에게 신뢰받는 평론가 중 한 명으로, 인지도가 높고 그 팬층 또한 두텁다. 이렇게 작품 소개에 잘 알려진 전문가를 동원하는 것은 700쪽을 넘어가는 복잡한 장편소설을 읽기 전에 독자들의 입맛을 돋굴 수 있는 좋은 전략으로 보인다.

 

문학동네 유튜브

 

음악 플레이리스트 영상을 제작하여 책의 총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시도는 보다 종합적인 체험을 원하는 젊은 독자층에게 효과적인 마케팅처럼 보인다. 하루키는 재즈를 소설의 소재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을 테마로 한 재즈 플레이리스트는 SNS에서 꾸준히 양성되어 온 바 있다. 문학동네는 광고의 일환으로 유명 재즈 유튜버에게 플레이시트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문학동네의 하루키 테마 플레이리스트 (위) / 유튜버 "JAZZ IS EVERYWHERE"의 하루키 테마 재즈 플레이리스트

 

 

소설의 내용 측면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그만의 환상 세계와 상실과 사랑이 콘셉트의 중심이 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 기묘한 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초현실적 도시가 이야기의 주 무대를 이루고 있고, 그 배경은 뒤표지에도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해, 우리는 둘만의 비밀 도시를 만들었다. 분리되는 그림자, 바늘 없는 시계탑, 그리고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문학동네는 보도자료에서도 3부에 다다르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꿈, 현실, 도시, 상실, 사랑 같은 중심 테마를 나열한다.

 

 

3. 총평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란 홍보 문구만큼 확실하고 효과적인 판매 전략도 없으리라.